'걷고싶은'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8.07.20 역설적이지만 보행은 머무름이자 소통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1 프랑스 파리 구도심 거리 대부분이 주말이면 2차로를 1차로 일방통행로로 바꿔 보행자들(관광객이 많음)이 보다 쉽게 걷도록 배려한다. /경남도민일보 유은상 기자


이 글은 한국토지공사와 국토해양부가 공동으로 펴내는 격월간지 <시민과 도시> 7.8월호에 낸 기고글입니다. 토공으로부터 먼저 제 블로그에 올려도 된다고 양해를 받아서 우선 이 곳에 올리고, 뒤에 책에 실렸습니다.


역설적이지만 보행은 머무름이자 소통이다

- 부제: 보행이 지닌 도시 문화적 의미

글쓰기에 앞서

지난 20069월 초 9일간의 일정으로 국가균형발전위원회가 주최한 ‘살고 싶은 지역 만들기 일본연수’에 참여했었다. 연수에는 국가균형발전위원회 부위원장과 담당자,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 ‘살고 싶은 지역 만들기’ 실무팀, 광역‧지역 일간지, 일본 마을만들기 국내 전문가들이 함께했었다. 이 마을만들기에 기초해서 행자부, 농림부(현 농림해양수산부), 건설교통부(현 국토해양부)는 각종 사업을 2년 가까이 펼치고 있다. 현 시점에서 중앙정부 중심의 다양한 ‘마을만들기’(혹은 도시는 창조도시) 프로젝트가 얼마나 일관성 있고, 그 정책 취지에 맞는지 점검할 때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점검이 혹여 이 프로젝트의 지향점마저 버리지는 않았으면 한다. 이 부분은 청탁받은 내용과는 다소 차이가 있어 이쯤으로 줄이겠다. 어떻든 이 글이 그 점검에 작으나마 도움이 됐으면 한다.

보행은 있었지만 보행권은 없었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메트로폴리탄), 심지어 내가 사는 공간인 마산.창원과 같은 중간 규모의 도시에 살지 않고 농촌에 사는 이에게 ‘보행권이 없다’는 말을 해보시라. 혹여 부모님이 농촌 출신이라면 어린 시절 ‘걸을 수 있는 권리’가 필요했는지 물어보시라. 직립보행은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이긴 하지만 걸을 수 있는 권리는 아주 생소한 말이다. 이 생소한 권리가 현대 사회의 특징 중 하나에서 나왔다. 바로 ‘도시’다. 그것도 역사시대 이후 이처럼 비대해진 적이 없는 도시 때문에.

유인원에서 현대인과 비슷한 직립보행을 하는 류로 진화하고서 인간에게 보행은 일반적인 행위이자 존재 형태였다. 물론 인간은 자연에서 직접 얻거나 자연을 이용해 얻는 자원과 식량 등이 늘어남에 따라 다스리는 존재와 다스림을 받는 존재로 나뉜다. 이 시기(역사 시대 전후) 이후 보행은 계급․계층적 성격을 띤다. 역사 시기마다 그 형태를 달리하지만 다스리는 이들에게 보행은 선택의 문제였다. 동물을 이용한 이동수단이 발달하고, 다스림을 받는 이가 다스리는 자(혹은 그 그룹)가 원하는 곳까지 이 이동수단으로 이동시켜줬다. 다스리는 자에겐 보행은 최소화되거나 이른바 ‘산책’이란 뜻에 가까웠다. 하지만 다스림을 받는 자, 혹은 생산물을 만드는 이에게 보행은 선택이 아닌 생존이자 생활이었다. 다스리는 자는 심지어 보행을 천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보행은 이렇게 이원화됐다. 근대 이전(심지어 근대 초기조차) 서구 사회든, 동양이든지 이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보행에 이렇게 이원적 모습을 나타냈더라도 여전히 ‘보행권’이란 말은 없거나 불필요했다. 다스리는 자이든, 다스림을 받는 자이든 자신이 원하면 언제 어디서든 별다른 장애 없이 걸을 수 있었다. 이 시기 ‘보행’은 팽창된 현대 도시 공간의 그것과는 구분된다. 지금이라도 농촌을 가면, 심지어 자신이 사는 뒷산만 가더라도 걷는 데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이처럼 걸을 수 있는 권리란 말은 현대 이전, 그리고 지금처럼 급팽창된 현대 도시 공간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할 이유도 없었다. 만약 필요했다면 주로 보행하는 이들이던 다스림을 당하는 자들이 반란을 꾀한 프랑스 대혁명 때 ‘빵과 자유를 달라’와 함께 ‘마음 놓고 걷게 해달라’란 요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2. 사회당 출신의 베르트랑 들라노에 파리 시장은 주말이면 구도심을 중심으로 파리 곳곳을 보행자‧자전거 전용 도로로 만드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보행자가 안전하게 찾을 수 있으면 문화는 자연스레 생성된다. 사진은 주말 보행자 전용 도로가 된 곳에서 파리 젊은이들이 인라인스케이트로 묘기를 부리는 장면. /경남도민일보 유은상 기자


‘도시로, 도시로’ 팽창한 현대 도시에선 마음 놓고 걸을 자유가 없다

“(서울)시청에서 신촌까지 얼마 정도 걸리죠”라고 누군가 물어봤다고 가자. 대부분의 사람은 “지하철로 네 구간입니다” 혹은 “택시(버스)로 얼마 정도 걸립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여기에서 시간은 ‘걸어서 얼마’라는 의미가 들어있지 않다. 이처럼 이동속도는 걷는 속도가 아닌 전철이나 자동차(혹은 버스)에 의한 옮겨지는 속도이다. 도시민의 대다수는 이미 속도란 전철과 자동차가 달리는 속도에 맞춰져 있다.

자동차‧버스‧전철의 속도는 현대 도시를 이해하는 중요한 척도다. 현대 도시는 생산과 소비를 위해 고도로 압축된 공간이다. 자본의 집적과 집중을 위해 되도록 길은 직선이어야 한다. 또한 자본집적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사람과 생산을 위한 원자재, 그리고 만들어진 상품은 신속히 나르고 모아야 한다. 자본의 회전율을 높이기 위해서다. 마산과 창원 같은 대공장이 많은 도시에서 80년대와 90년대 대중교통이 발달하고, 통근 버스가 발달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최대한 빠른 시간, 정확한 시간에 생산하는 이들을 이동시켜야 하기 때문에.

그 사이 사람들은 농촌에서 ‘도시로, 도시로’ 흡수됐다. 농촌인구는 87년 1000만에서 500만으로, 한국의 도시화율은 2005년 88.4%에 이르러 홍콩 같은 도시국가 형태의 도시를 제외하면 세계 최고 수준이다. 사실상 한국민 절대다수는 도시민이다.

여기서 도시는 다시 한번 탈바꿈한다. 몇몇 이들의 특권으로만 여겨지던 자동차가 경제성장을 통해 일하는 이들에게도 주어진다. 이른바 80년대 말, 90년대 초의 ‘마이카 시대’가 한국에도 온 것이다. ‘마이카 시대’는 도시의 모습을 바꿔놓았다.

길은 또 확대된다. 이때에도 길은 보행로가 아닌 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이다. 또한 차도 머물러야 하기에 계속 차가 머물 수 있는 공간인 주차장을 확대해나갔다. 한계가 뚜렷한 도시 공간은 걷는 이들을 거의 배려하지 않았다.

농경사회에선 마을 입구나 중간에 있던 마을 공동 마당(경남 지역에선 이를 베꾸마당이라고 했다)에서 함께 어울려 놀 수 있었다. 이농 시대 도시에서 이런 풍경은 사라졌지만 대신 골목길이 그 아쉬움을 달랬다. 도시에서 아이들의 휴식처이나 놀이 공간이던 골목길마저 이 차가 마치 점령군처럼 지배해버렸다. 심지어 도로 위에 있던 건널목도 차의 이동 속도를 더 빨리 하려고 지하도나 육교로 바꾼다. 걷는 이들은 도시에서 삼류 인간으로 전락한다. 하지만 다행히 걷는 것은 이제 ‘해야만 하는 그 무엇’이 아닌 도시민 대다수에게 ‘선택의 문제’로 바뀐다. 최소한 걷기에선 도시민 누구나 돈의 많고 적음, 권력소유 유무와 상관없이 평등하다.

‘마이카 시대’의 도래는 기존 생산에만 필요하다고 여겼던 이들이 상품을 소비하는 데도 중요한 주체가 됐음을 알려줬다. 서울과 같은 몇몇 대도시에만 있던 백화점이 지역 주요도시에도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아직 이 시기에는 백화점보다 주로 재래시장이나 저층 도심 상가 지에서 소비가 이뤄졌다. 그래서 쇼핑은 곧 평소보다 많이 걷기와 다름없었다. 사람들은 저층 도심 상가 지를 중심으로 보행하는 자유를 누렸다. 이곳에서 보행은 머무름과 만남을 의미했다. 저층 도심 상가지 거리는 평소 보기 어려운 이들을 자주 볼 수 있는 광장(혹은 과거 농촌의 마을 공동 마당)과 같은 역할을 했다. 물론 저층 도심 상가 지가 번성하면서 걷기가 항상 편한 것은 아니었다. 차들이 이곳을 심심찮게 지나가며 보행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최소한 이 시기 차들은 적지 않은 인파로 말미암아 이곳을 지나는 게 성가셔 다른 길로 피해 가는 아량은 보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3. 유럽 도시 중 보행자의 천국이자 트램(경전철)의 도시로 불리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시의 ‘쁘띠 프랑스’(작은 프랑스 혹은 아름다운 프랑스라는 뜻) 지역 전경. /경남도민일보 유은상 기자

하지만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대형마트는 대도시뿐만 아니라 지역 중소도시의 기성 저층 도심 상가 지의 상권을 붕괴시켰다. 상권 붕괴는 기존 도심 상가 지를 슬럼화시켰고, 동시에 상가지 거리조차 썰렁하게 만들었다. 최소한 이곳은 이제 사람들이 걷고, 머무르고, 서로 만나며 소통하고픈 매력적인 공간에서 제외된다. 도시민들은 보행할 권리를 빼앗겼는지 아닌지를 잊고 지하주차장에서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대한 보행이 적은 쇼핑을 한다.

머무를 자유, 소통할 자유를 위해 ‘보행권’이 필요하다

대도시든, 지역의 중소도시든 대중교통수단을 한 번도 이용하지 않고 걸어보시라. 아마도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지쳐 쓰러질 것이다. 조금만 걸으면 인도와 도로 사이를 가로지르는 지하주차장 입구가 가로막고, 저곳으로 가려고 무시무시한 지하도를 건너야 한다. 인도 곳곳을 가로막은 각종 입간판은 짜증을 더한다. 걷다가 조금 쉬고 싶지만 제법 돈을 지출해야하는 커피숍 같은 쉼터 이외는 땀을 식힐 장소가 거의 없다. 기성 상가 지를 간더라도 여전히 보행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것이라면 한 뼘의 광장도 잘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최근에는 전국 곳곳 기성 상가 지들이 ‘보행자 전용거리’, ‘문화의 거리’ 등으로 새롭게 만들어져 보행자를 배려하려고 해 다행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4. 아구찜 음식점이 즐비하고 고급 의류점이 많았던 마산의 대표적 기성 도심 상가 지였던 마산 오동동 문화의 거리 내 빈 점포가 갤러리로 변했다. 상권이 죽으면서 생긴 빈 점포는 씁쓸하지만 그 비워진 공간을 작품으로 채운 공공미술은 쓸쓸함을 그나마 줄인다.    /경남도민일보 김구연 기자


걷는다는 것은 반드시 머물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도시에선 머물 수 있는 공간을 쉽게 찾기 어렵다. 걷기가 어렵고, 머물며 쉴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다는 것은 소통을 가로막는다. 머무름이 없는 공간에선 문화란 생성되지 않는다. 서로 만나서 손쉽게 얘기할 수 있는 시간도 그만큼 줄어든다. 자연스레 집, 직장, 대형 원스톱 쇼핑공간과 같이 몇몇 점과 점만이 의미가 있고, 다른 도시 공간은 무의미해진다. 만약 차를 운전하거나 차로 이동을 한다고 할 때 우리는 스쳐가는 공간을 자세히 기억할까. 그저 스치는 정도의 ‘봄’으로 머무른다. 마치 차를 타고 지나치는 풍경처럼 내가 사는 도시(혹은 지역)에 대해 ‘봄’이 적어지면 관심도 당연히 적어진다. 사는 공간에 대해 관심이 적은 이들에게 ‘지역 커뮤니티’는 있을 리 만무하다.

거꾸로 되짚어보자. 걷기는 머물 공간과 시간을 필요로 하고, 머무름은 소통과 문화를 생성시킨다. 또한 걷기는 ‘봄’을 더 많이, 깊게 만든다. 보는 만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느낀다. 느낀 만큼 관심은 다시 깊어지고, 그런 관심사를 공유하는 이들 사이에 ‘커뮤니티’는 자연스레 생성된다. 물론 인터넷 공간에서 하는 비대면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나타난 문화와 커뮤니티도 예상을 넘어 강력해지고 있다. 그렇더라도 얼굴을 보고 서로 만나서 하는 대면 접촉 소통만큼 강력할 순 없다. 이렇게 도시는 보행을 전제로 이농을 통해 잃은, 아니 현재 도시에 걸맞은 새로운 커뮤니티를 생성한다. 다소 확장하자면 이런 커뮤니티들이 지방자치, 혹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필수조건인지도 모르겠다.

도시는 걷고 싶은 공간으로 새롭게 꾸며 져야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5. 2002년 마산‧창원 두 도시(생활권이 같은 두 곳 인구수를 합치면 약 100만이다)를 통틀어 가장 큰 기성 도심 상가 지였던 마산 창동에서 한 시민단체가 ‘청소년 거리축제’를 했다. 하지만 6년여 만에 마산 창동의 유동인구는 절반으로 줄었다. 그 사이 대형마트는 마산시에만 4개점이나 늘었다. /경남도민일보 김구연 기자

2005년 서울시가 보행권 확보를 위한 시범가로 사업을 한 ‘신촌 걷고 싶은 거리’에서 마주한 풍경이 있다. 차도와 보도를 자연스레 경계 지운 가로 벤치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 20대 초반 젊은 여성은 휴대전화로 누군가와 웃으며 계속 대화하고, 60대 남성은 신문을 펼쳐 보고 있었다. 가로 벤치라는 보행자를 위한 조그만 배려가 이렇듯 세대 간 다르면서도 뭔가 어울리는 듯한 묘한 풍경을 자아냈다. 걷고 머무름은 효율성 뒤로 가려졌던 또 다른 의미를 잉태한다.

또한 보행권은 현대 도시에선 새로운 문화를 생성시킨다. 걸을 수 없고, 머무를 공간이 없다면 문화는 그저 문화예술회관이나 대학로의 공연장들과 같이 몇몇 전문 예술인들이 만든 예술행위나 영화 같은 대중예술을 소비하는 수준에 그칠 것이다. 아니, 스스로 문화행위를 체험해보지 못한 이들이 이런 예술 소비에조차 적극적일까?

새로운 커뮤니티와 새로운 도시의 모습을 만들고 싶다면, 우리가 사는 도시는 걷고 싶은 공간으로 리모델링돼야 하지 않을는지.

/경남도민일보 이시우 기자

* 참고로 이 글에 있는 사진의 저작권은 경남도민일보사와 해당 사진부 기자에게 있음다. 혹여 퍼나르실 때는 꼭 출처를 밝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Posted by 늘 축제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