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언론노조 경고 파업 집회 참석뒤 다음 부산.경남 아고라에 남긴 글임다.

23일 언론노조 주최로 "언론 장악저지, 지역언론 사수"를 위한 '이명박, 함 붙자'라는 제목으로 언론노조 경고파업을 갔다왔습니다. 오후 2시30분에는 최근 기획재정부가 지역신문발전지원법에 의한 내년 기금을 전액 삭감하고, 신문법에 의한 신문발전기금을 전액 삭감한 테러에 항의하고자 한나라당사 앞에서 지역신문 노동자들이 중심이 돼 기자회견 겸 약식집회를 했음다. 그 뒤 바로 세종문화예술회관으로 이동해 언론노조 주최 경고파업 집회에 참석했음다. 언론노조 전체 조합원이 1만 8000명인데, 이날 경고성 파업이라 1000여 명이 모였습니다. 저희 언론노조 경남도민일보 지부 조합원(전체 76명)들도 부분파업을 하며 현업을 중단하고 14명이 서울집회에 참여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언론노조 주최 집회 중 가장 많은 인원이 모였고, 강한 메시지와 투쟁 결의가 이어졌습니다. 참고로 언론노조는 2001년 산별노조로 새롭게 재편하면서 실질적인 전면파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보도매체 종사자 상황은 이렇습니다. 첫째는 보도매체의 공공성을 이명박 정권에 의해 심각히 훼손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바로 방송통신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한국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을 이명박의 형님(멘토)인 최시중을 낙하산으로 앉힌 것이고, 대선 때 이명박 언론특보였던 구본홍을 낙하산 사장으로 앉힌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방송 광고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한국방송광고공사(KOBACO)에도 KBS창원본부장 출신이자 대선 당시 언론특보였던 양휘부를 앉혔습니다. 그리고 임원들도 줄줄이 MB낙하산 인사로 채워졌습니다.한국방송광고공사는 현행 방송법에 의해 광고주들로부터 일괄 방송광고를 수주받아 지배적 매체(지상파 방송사)인 KBS, MBC, SBS에도 광고를 나눠주고, 이와 동시에 시장지배적 매체이지 않은 지역민간방송(KNN 등)이나 불교방송, 기독교방송, 그리고 라디오에도 광고를 일정 비율로 나눠줍니다. 이를 통해 방송사가 직접 광고를 수주하지 않고, 다양한 매체가 공존할 수 있는 생존의 토대를 만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낙하산 인사로도 모자라 이 방송광고공사를 해체하고, 민간자본이 운영하는 제2의 민간방송광고사(민영 미디어렙)를 허용해 방송 광고의 무한 경쟁을 도입하겠다고 합니다. 이는 방송의 공공성을 무시하고 시장주의를 통해 일부 방송만 남기겠다는 의도입니다. 이렇게 되면 지역의 MBC, 지역민방(KNN 등)은 직접 광고수주를 해야해서 그간 눈돌리지 않았던 지역광고시장에도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상대적 약자인 지역일간지들은 순식간에 지역 광고시장에서 퇴출되며, 지역 일간지도 생존할 수 없게 되죠. 하지만 문제는 지금껏 좋건 싫건 지역 뉴스의 70-80% 이상을 방송 기자가 아닌 지역신문 기자에 의해 생산됐다는 사실입니다. 지역일간지가 사라진다면 지역민들은 이제 기존 지역정보의 20-30% 정도만을  접할 수 있어 비수도권에 산다는 것 자체가 문화다양성, 정보다양성이라는 시민으로의 기본적이고, 보편적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불평등한 삶을 살게 됩니다. 더욱이 지역 권력자(혹은 토호세력)들에 대한 감시와 견제가 사라져 지역은 그야말로 토호들이 모든 것을 독점하는 세상이 되겠지요.

  또한 최근에는 조중동의 불법경품으로 인해(이는 시장지배적 회사가 공정하지 않은 불법적 유통행위를 통해 독과점을 더욱 확대하는 행위로 현 공정거래법으로도 위반되는 사항입니다) 고사직전인 신문시장을 정상화하고 신문의 공공성 확보를 위해 일정 조건을 갖춘 신문사들에게 직간접 지원을 할 수 있도록 노무현 정권 때 학계, 언론시민단체, 신문종사자들이 장시간 머리를 맞대 만든 신문법과 지역신문법에 의한 발전 기금 내년 예산을 기획재정부가 전액 삭감했습니다. 법의 실질적인 지원책이 되는 기금을 삭감해 법을 무력화시킨 것 입니다.

  그래서 현재 조건은 보도매체의 공공성 사수와 함께 보도매체 종사자, 특히 지역보도매체(방송.신문) 종사자에게는 생존권을 지킬 수밖에 없는 생존권 투쟁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권의 독재적 성격으로 인한 언론 장악 음모와 룰도 없는 절대적인 시장주의 정책으로 인한 다수 보도매체 종사자들의 생존권 위협이 동시다발로 이뤄지고 있는 형국입니다.

  언론노조는 이날 경고파업 만이 아니라 하반기 실질적인 총파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날 오후 4시 경고파업 집회에 갔을 때 최소한 MBC, SBS, 한겨레, 경향, 각 지역 방송사, 그리고 경남도민일보 등 일부 지역일간지 노조는 실질적인 총파업을 할 수 있겠다는 분위기가 느껴졌음다. 하반기 언론노조가 산별노조 전환 이후 처음으로 전면파업을 통해 이명박 정권의 심갃한 언론 공공성 훼손을 저지하고, 보도매체 종사자들의 생존권 사수를 해나갈 것입니다. 말만이 아니라 우리 보도매체 종사자들이 촛불들의 요구에 의해 전면에 나설 것입니다. 이명박 정권에 실질적인 위협을 우리 노조가 시작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암튼, 이날 1000여 명의 언론노조 종사자들은 촛불에 부끄러워서라도 투쟁의 전면에 나서야한다는 생각을 더욱 굳혔습니다.

  그리고 다시 청계광장으로 가서 보건의료산업 노조 조합원들과 서울시민들과 함께 촛불을 들었습니다. 거제에서 왔다는 대우조선 노동자 한 분(얘기하는 스탈은 노조 간부는 아닌 듯 했습니다)이 자유발언에서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언론이 중요합니다. 알짜배기 대우조선해양을 정부가 해외투기자본이나 국내 독점자본에게 팔아먹으려합니다. 이게 국민으로선 얼마나 손실인지 아셔야합니다. 우리는 국민기업으로 거듭나길 바랍니다. 거제 대우조선에서 먼저 사회 공공성 확보를 위한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언론 노동자들이 이걸 제대로 알려주십시오."

 또 한 명의 자유발언자였던 보건의료산업노조 위원장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보건의료산업노조는 사실 임금협상보다 최근에는 국민의 공공적 서비스인 의료 공공성 사수와 확보를 위해 더많은 교섭을 했는데, 언론은 그 사실을 보도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올해 들어서는 기적같이 조중동을 제외한 상당수 보도매체가 우리의 이런 파업 투쟁을 제대로 보도해주었습니다.  파업과 교섭을 하면서 올해처럼 이렇게 행복한 날은 투쟁을 하는 때는 없었습니다. 언론노조 동지들에게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이렇게 사실보도에 충실해주십시오"라고 하더군요.

  사실 보건의료산업노조는 민주노총 산하 산별노조 중 어느 곳보다 임금투쟁보다는 의료공공성 확보와 사수를 위해 파업을 해온 곳이었는데, 국민들이 그 사실을 우리 언론의 게으름으로 인해 잘 몰랐거든요. 보건의료산업노조 위원장의 그 말을 듣고 부끄러워서 눈물이 나려고 하더군요. 암튼 그렇게 촛불집회가 거의 마칠 즈음 오후 9시 30분께 버스로 다시 마산으로 왔습니다.


이상 간단한 서울 집회 참석한 후일담을 우리 경남 아고리언들에게 들려드립니다. 많이 길었는데, 지송. 그리고 마산-다단계 님이 한국방송광고공사 해체와 28일 있을 IPTV 법제화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왜 지금 2mB 정권이 밀어붙이는 것처럼 하면 언론 공공성이 심각하게 훼손되는지 계속 써서 올리라고 보채시는데요, 일반 시민들에겐 생소한 용어들(대부분 영어임다)이  많아 풀어서 조만간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래 기사는 23일 서울 집회에 대한 글.사진.동영상이 있는 경남도민일보 24일자 기사와 언론노보에 실린 기사들입니다. 링크만 시키겠음다. 저작권 문제 때문에 바로 그


페이지로 가도록 타겟팅해놓겠음다.


  언론노보 “권력과 자본의 시녀로 전락할 것인가!”


 언론노보 "언론노조, 지역신문발전기금 삭감 기도 규탄"


 경남도민일보 24일자 "지역신문발전기금 삭감에 반발 거세"


  경남도민일보 24일자 "

"지역신문 죽이는 정부·한나라당 규탄"

언론노조 지역신문협 한나라당사 앞 기자회견
"발전기금 전액 삭감, 지역언론 말살 정책" 성토


경남도민일보 24일자 김범기 기자 취재수첩 ""한판 붙자! 이명박"


경남도민일보 23일자 사설 "이명박 정부 '언론장악' 음모 중지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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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프랑스 파리 구도심 거리 대부분이 주말이면 2차로를 1차로 일방통행로로 바꿔 보행자들(관광객이 많음)이 보다 쉽게 걷도록 배려한다. /경남도민일보 유은상 기자


이 글은 한국토지공사와 국토해양부가 공동으로 펴내는 격월간지 <시민과 도시> 7.8월호에 낸 기고글입니다. 토공으로부터 먼저 제 블로그에 올려도 된다고 양해를 받아서 우선 이 곳에 올리고, 뒤에 책에 실렸습니다.


역설적이지만 보행은 머무름이자 소통이다

- 부제: 보행이 지닌 도시 문화적 의미

글쓰기에 앞서

지난 20069월 초 9일간의 일정으로 국가균형발전위원회가 주최한 ‘살고 싶은 지역 만들기 일본연수’에 참여했었다. 연수에는 국가균형발전위원회 부위원장과 담당자,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 ‘살고 싶은 지역 만들기’ 실무팀, 광역‧지역 일간지, 일본 마을만들기 국내 전문가들이 함께했었다. 이 마을만들기에 기초해서 행자부, 농림부(현 농림해양수산부), 건설교통부(현 국토해양부)는 각종 사업을 2년 가까이 펼치고 있다. 현 시점에서 중앙정부 중심의 다양한 ‘마을만들기’(혹은 도시는 창조도시) 프로젝트가 얼마나 일관성 있고, 그 정책 취지에 맞는지 점검할 때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점검이 혹여 이 프로젝트의 지향점마저 버리지는 않았으면 한다. 이 부분은 청탁받은 내용과는 다소 차이가 있어 이쯤으로 줄이겠다. 어떻든 이 글이 그 점검에 작으나마 도움이 됐으면 한다.

보행은 있었지만 보행권은 없었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메트로폴리탄), 심지어 내가 사는 공간인 마산.창원과 같은 중간 규모의 도시에 살지 않고 농촌에 사는 이에게 ‘보행권이 없다’는 말을 해보시라. 혹여 부모님이 농촌 출신이라면 어린 시절 ‘걸을 수 있는 권리’가 필요했는지 물어보시라. 직립보행은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이긴 하지만 걸을 수 있는 권리는 아주 생소한 말이다. 이 생소한 권리가 현대 사회의 특징 중 하나에서 나왔다. 바로 ‘도시’다. 그것도 역사시대 이후 이처럼 비대해진 적이 없는 도시 때문에.

유인원에서 현대인과 비슷한 직립보행을 하는 류로 진화하고서 인간에게 보행은 일반적인 행위이자 존재 형태였다. 물론 인간은 자연에서 직접 얻거나 자연을 이용해 얻는 자원과 식량 등이 늘어남에 따라 다스리는 존재와 다스림을 받는 존재로 나뉜다. 이 시기(역사 시대 전후) 이후 보행은 계급․계층적 성격을 띤다. 역사 시기마다 그 형태를 달리하지만 다스리는 이들에게 보행은 선택의 문제였다. 동물을 이용한 이동수단이 발달하고, 다스림을 받는 이가 다스리는 자(혹은 그 그룹)가 원하는 곳까지 이 이동수단으로 이동시켜줬다. 다스리는 자에겐 보행은 최소화되거나 이른바 ‘산책’이란 뜻에 가까웠다. 하지만 다스림을 받는 자, 혹은 생산물을 만드는 이에게 보행은 선택이 아닌 생존이자 생활이었다. 다스리는 자는 심지어 보행을 천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보행은 이렇게 이원화됐다. 근대 이전(심지어 근대 초기조차) 서구 사회든, 동양이든지 이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보행에 이렇게 이원적 모습을 나타냈더라도 여전히 ‘보행권’이란 말은 없거나 불필요했다. 다스리는 자이든, 다스림을 받는 자이든 자신이 원하면 언제 어디서든 별다른 장애 없이 걸을 수 있었다. 이 시기 ‘보행’은 팽창된 현대 도시 공간의 그것과는 구분된다. 지금이라도 농촌을 가면, 심지어 자신이 사는 뒷산만 가더라도 걷는 데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이처럼 걸을 수 있는 권리란 말은 현대 이전, 그리고 지금처럼 급팽창된 현대 도시 공간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할 이유도 없었다. 만약 필요했다면 주로 보행하는 이들이던 다스림을 당하는 자들이 반란을 꾀한 프랑스 대혁명 때 ‘빵과 자유를 달라’와 함께 ‘마음 놓고 걷게 해달라’란 요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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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사회당 출신의 베르트랑 들라노에 파리 시장은 주말이면 구도심을 중심으로 파리 곳곳을 보행자‧자전거 전용 도로로 만드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보행자가 안전하게 찾을 수 있으면 문화는 자연스레 생성된다. 사진은 주말 보행자 전용 도로가 된 곳에서 파리 젊은이들이 인라인스케이트로 묘기를 부리는 장면. /경남도민일보 유은상 기자


‘도시로, 도시로’ 팽창한 현대 도시에선 마음 놓고 걸을 자유가 없다

“(서울)시청에서 신촌까지 얼마 정도 걸리죠”라고 누군가 물어봤다고 가자. 대부분의 사람은 “지하철로 네 구간입니다” 혹은 “택시(버스)로 얼마 정도 걸립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여기에서 시간은 ‘걸어서 얼마’라는 의미가 들어있지 않다. 이처럼 이동속도는 걷는 속도가 아닌 전철이나 자동차(혹은 버스)에 의한 옮겨지는 속도이다. 도시민의 대다수는 이미 속도란 전철과 자동차가 달리는 속도에 맞춰져 있다.

자동차‧버스‧전철의 속도는 현대 도시를 이해하는 중요한 척도다. 현대 도시는 생산과 소비를 위해 고도로 압축된 공간이다. 자본의 집적과 집중을 위해 되도록 길은 직선이어야 한다. 또한 자본집적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사람과 생산을 위한 원자재, 그리고 만들어진 상품은 신속히 나르고 모아야 한다. 자본의 회전율을 높이기 위해서다. 마산과 창원 같은 대공장이 많은 도시에서 80년대와 90년대 대중교통이 발달하고, 통근 버스가 발달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최대한 빠른 시간, 정확한 시간에 생산하는 이들을 이동시켜야 하기 때문에.

그 사이 사람들은 농촌에서 ‘도시로, 도시로’ 흡수됐다. 농촌인구는 87년 1000만에서 500만으로, 한국의 도시화율은 2005년 88.4%에 이르러 홍콩 같은 도시국가 형태의 도시를 제외하면 세계 최고 수준이다. 사실상 한국민 절대다수는 도시민이다.

여기서 도시는 다시 한번 탈바꿈한다. 몇몇 이들의 특권으로만 여겨지던 자동차가 경제성장을 통해 일하는 이들에게도 주어진다. 이른바 80년대 말, 90년대 초의 ‘마이카 시대’가 한국에도 온 것이다. ‘마이카 시대’는 도시의 모습을 바꿔놓았다.

길은 또 확대된다. 이때에도 길은 보행로가 아닌 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이다. 또한 차도 머물러야 하기에 계속 차가 머물 수 있는 공간인 주차장을 확대해나갔다. 한계가 뚜렷한 도시 공간은 걷는 이들을 거의 배려하지 않았다.

농경사회에선 마을 입구나 중간에 있던 마을 공동 마당(경남 지역에선 이를 베꾸마당이라고 했다)에서 함께 어울려 놀 수 있었다. 이농 시대 도시에서 이런 풍경은 사라졌지만 대신 골목길이 그 아쉬움을 달랬다. 도시에서 아이들의 휴식처이나 놀이 공간이던 골목길마저 이 차가 마치 점령군처럼 지배해버렸다. 심지어 도로 위에 있던 건널목도 차의 이동 속도를 더 빨리 하려고 지하도나 육교로 바꾼다. 걷는 이들은 도시에서 삼류 인간으로 전락한다. 하지만 다행히 걷는 것은 이제 ‘해야만 하는 그 무엇’이 아닌 도시민 대다수에게 ‘선택의 문제’로 바뀐다. 최소한 걷기에선 도시민 누구나 돈의 많고 적음, 권력소유 유무와 상관없이 평등하다.

‘마이카 시대’의 도래는 기존 생산에만 필요하다고 여겼던 이들이 상품을 소비하는 데도 중요한 주체가 됐음을 알려줬다. 서울과 같은 몇몇 대도시에만 있던 백화점이 지역 주요도시에도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아직 이 시기에는 백화점보다 주로 재래시장이나 저층 도심 상가 지에서 소비가 이뤄졌다. 그래서 쇼핑은 곧 평소보다 많이 걷기와 다름없었다. 사람들은 저층 도심 상가 지를 중심으로 보행하는 자유를 누렸다. 이곳에서 보행은 머무름과 만남을 의미했다. 저층 도심 상가지 거리는 평소 보기 어려운 이들을 자주 볼 수 있는 광장(혹은 과거 농촌의 마을 공동 마당)과 같은 역할을 했다. 물론 저층 도심 상가 지가 번성하면서 걷기가 항상 편한 것은 아니었다. 차들이 이곳을 심심찮게 지나가며 보행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최소한 이 시기 차들은 적지 않은 인파로 말미암아 이곳을 지나는 게 성가셔 다른 길로 피해 가는 아량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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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유럽 도시 중 보행자의 천국이자 트램(경전철)의 도시로 불리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시의 ‘쁘띠 프랑스’(작은 프랑스 혹은 아름다운 프랑스라는 뜻) 지역 전경. /경남도민일보 유은상 기자

하지만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대형마트는 대도시뿐만 아니라 지역 중소도시의 기성 저층 도심 상가 지의 상권을 붕괴시켰다. 상권 붕괴는 기존 도심 상가 지를 슬럼화시켰고, 동시에 상가지 거리조차 썰렁하게 만들었다. 최소한 이곳은 이제 사람들이 걷고, 머무르고, 서로 만나며 소통하고픈 매력적인 공간에서 제외된다. 도시민들은 보행할 권리를 빼앗겼는지 아닌지를 잊고 지하주차장에서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대한 보행이 적은 쇼핑을 한다.

머무를 자유, 소통할 자유를 위해 ‘보행권’이 필요하다

대도시든, 지역의 중소도시든 대중교통수단을 한 번도 이용하지 않고 걸어보시라. 아마도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지쳐 쓰러질 것이다. 조금만 걸으면 인도와 도로 사이를 가로지르는 지하주차장 입구가 가로막고, 저곳으로 가려고 무시무시한 지하도를 건너야 한다. 인도 곳곳을 가로막은 각종 입간판은 짜증을 더한다. 걷다가 조금 쉬고 싶지만 제법 돈을 지출해야하는 커피숍 같은 쉼터 이외는 땀을 식힐 장소가 거의 없다. 기성 상가 지를 간더라도 여전히 보행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것이라면 한 뼘의 광장도 잘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최근에는 전국 곳곳 기성 상가 지들이 ‘보행자 전용거리’, ‘문화의 거리’ 등으로 새롭게 만들어져 보행자를 배려하려고 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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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 아구찜 음식점이 즐비하고 고급 의류점이 많았던 마산의 대표적 기성 도심 상가 지였던 마산 오동동 문화의 거리 내 빈 점포가 갤러리로 변했다. 상권이 죽으면서 생긴 빈 점포는 씁쓸하지만 그 비워진 공간을 작품으로 채운 공공미술은 쓸쓸함을 그나마 줄인다.    /경남도민일보 김구연 기자


걷는다는 것은 반드시 머물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도시에선 머물 수 있는 공간을 쉽게 찾기 어렵다. 걷기가 어렵고, 머물며 쉴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다는 것은 소통을 가로막는다. 머무름이 없는 공간에선 문화란 생성되지 않는다. 서로 만나서 손쉽게 얘기할 수 있는 시간도 그만큼 줄어든다. 자연스레 집, 직장, 대형 원스톱 쇼핑공간과 같이 몇몇 점과 점만이 의미가 있고, 다른 도시 공간은 무의미해진다. 만약 차를 운전하거나 차로 이동을 한다고 할 때 우리는 스쳐가는 공간을 자세히 기억할까. 그저 스치는 정도의 ‘봄’으로 머무른다. 마치 차를 타고 지나치는 풍경처럼 내가 사는 도시(혹은 지역)에 대해 ‘봄’이 적어지면 관심도 당연히 적어진다. 사는 공간에 대해 관심이 적은 이들에게 ‘지역 커뮤니티’는 있을 리 만무하다.

거꾸로 되짚어보자. 걷기는 머물 공간과 시간을 필요로 하고, 머무름은 소통과 문화를 생성시킨다. 또한 걷기는 ‘봄’을 더 많이, 깊게 만든다. 보는 만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느낀다. 느낀 만큼 관심은 다시 깊어지고, 그런 관심사를 공유하는 이들 사이에 ‘커뮤니티’는 자연스레 생성된다. 물론 인터넷 공간에서 하는 비대면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나타난 문화와 커뮤니티도 예상을 넘어 강력해지고 있다. 그렇더라도 얼굴을 보고 서로 만나서 하는 대면 접촉 소통만큼 강력할 순 없다. 이렇게 도시는 보행을 전제로 이농을 통해 잃은, 아니 현재 도시에 걸맞은 새로운 커뮤니티를 생성한다. 다소 확장하자면 이런 커뮤니티들이 지방자치, 혹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필수조건인지도 모르겠다.

도시는 걷고 싶은 공간으로 새롭게 꾸며 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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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5. 2002년 마산‧창원 두 도시(생활권이 같은 두 곳 인구수를 합치면 약 100만이다)를 통틀어 가장 큰 기성 도심 상가 지였던 마산 창동에서 한 시민단체가 ‘청소년 거리축제’를 했다. 하지만 6년여 만에 마산 창동의 유동인구는 절반으로 줄었다. 그 사이 대형마트는 마산시에만 4개점이나 늘었다. /경남도민일보 김구연 기자

2005년 서울시가 보행권 확보를 위한 시범가로 사업을 한 ‘신촌 걷고 싶은 거리’에서 마주한 풍경이 있다. 차도와 보도를 자연스레 경계 지운 가로 벤치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 20대 초반 젊은 여성은 휴대전화로 누군가와 웃으며 계속 대화하고, 60대 남성은 신문을 펼쳐 보고 있었다. 가로 벤치라는 보행자를 위한 조그만 배려가 이렇듯 세대 간 다르면서도 뭔가 어울리는 듯한 묘한 풍경을 자아냈다. 걷고 머무름은 효율성 뒤로 가려졌던 또 다른 의미를 잉태한다.

또한 보행권은 현대 도시에선 새로운 문화를 생성시킨다. 걸을 수 없고, 머무를 공간이 없다면 문화는 그저 문화예술회관이나 대학로의 공연장들과 같이 몇몇 전문 예술인들이 만든 예술행위나 영화 같은 대중예술을 소비하는 수준에 그칠 것이다. 아니, 스스로 문화행위를 체험해보지 못한 이들이 이런 예술 소비에조차 적극적일까?

새로운 커뮤니티와 새로운 도시의 모습을 만들고 싶다면, 우리가 사는 도시는 걷고 싶은 공간으로 리모델링돼야 하지 않을는지.

/경남도민일보 이시우 기자

* 참고로 이 글에 있는 사진의 저작권은 경남도민일보사와 해당 사진부 기자에게 있음다. 혹여 퍼나르실 때는 꼭 출처를 밝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Posted by 늘 축제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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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7월 15일자 1.4.5면에 배치된 기획기사 '한국인 절반 이렇게 산다-비정규직 800만 시대'를 보면 한국 노동자의 54%가 비정규직으로 산다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경향신문의 54%는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것을 인용한 것인데요, 노동부와 통계청 등 정부기관과는 다소 차이를 드러냅니다. 이는 상용직 노동자의 범위와 학습지 교사, 화물차 기사, 덤프트럭 기사 등과 같은 특수고용직을 노동자로 분류할 지, 자영업자로 분류할 지 등에 따른 차이입니다. 이를 테면 원청 업체로부터 실질적인 인사노무관리와 작업지시를 받으면서도 파견 업체의 노동자로 있는 사내하청업체 노동자는 노동부는 정규직으로 보지만 그 내용으로는 사실상 비정규직과 다를바 없어 광의의 비정규직으로 노동계는 분류하고 있죠. 그렇게 본다면 54%라는 것이죠.
  제가 왜 뜬금없이 정규직 노동자 파업 얘기를 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 얘기를 할까요? 어제 오늘 YTN에서 현대차노조(금속노조 현대차 지부)가 4시간 부분 파업을 한다면 보도가 뉴스 타임마다 나왔습니다. 그런데, 왜 파업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언급이 없었습니다. 기사로서도 이런 최악의 기사는 없다라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왜 파업을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더군요. 아무리 들어도. 같은 동종 업종 종사자로서 부끄러움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저희 지부장(언론노조 경남도민일보 지부)은 어제 YTN 구본홍 사장 내정자 낙하산 선임 반대를 위해 서울 출장을 가서 선임 저지투쟁(이른바 몸빵이죠)을 하러갔는데, 그 사실이 왠지 서글퍼지더군요.
  현대차와 기아차, GM대우 노조(금속노조 소속 지부)가 왜 4시간 파업을 할까요. 금속노조 올해 중앙교섭은 타결을 했는데도 말입니다. 각 사업장 사용자가 금속노조 산업별 중앙교섭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노조 형태는 최근 몇 년 사이에 개별 사업장 중심의 기업별 노조체계에서 산업별 단일 노조형태로 상당수 전환을 했습니다. 따라서 중앙교섭은 사회적 수준에서 사용자와 노동자 대표가 교섭을 하는 것이고, 각 지부(기존 기업별 노조들)들은 각 사에 맞는 임금이나 복지 수준을 보충교섭을 통해 획득합니다. 노동조합은 산업별 형태로 전환해 이에 걸맞는 교섭을 요구하는데, 사용자들은 협의회든, 연합회든 연합체계를 통해 교섭을 하려 않거든요. 노조의 형태가 기존과 질적으로 다르면 그 교섭 틀도 바뀌게 마련인데, 어떻게 보면 완성차 4사 사용자들이 그 교섭 틀을 거부하거나 노사관계가 사회적 합의 형태가 되지 않기 위해 완강히 저항하는 것입니다. 왜냐, 기존 기업별 노조 형태는 그 기업의 정규직 노동자들 수준에서 의제가 한정되지만 산업별 중앙교섭은 그 산업의 최저임금을 정하고, 복지, 근로조건의 최저 가이드 라인을 제시하기 때문에 교섭 자체가 사회적 의제 수준으로 확장됩니다. 그만큼 그 결과가 전체 사용자들에게 적용이 많이 되는 겁니다. 물론 현재는 산별 노조 전환 초기인데다, 현대차,기아차 등 완성차 4사 등과 같은 대형 사업장 사용자들의 산별 교섭 거부로 교섭 틀이 정착되진 않았습니다. 일종의 과도기죠.
  특히 금속노조든, 언론노조든, 아님 보건산업의료노조든 산업별 교섭의 중요성은 오히려 서두에서 말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최저 노동조건을 향상시키고 강제하는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섭 수준이 사회적 의제로 확장된다는 것이죠.
  이번 현대차, 기아차, GM대우 노조, 쌍용차 노조 등 완성차 4사 노조(금속노조 각 지부)가 4시간 부분 파업을 하는 이유는 역으로 대형 사업장 사용자들을 중앙교섭에 참여시켜 기존 기업 수준의 교섭의제를 사회적 수준으로 확장하기 위한 계기를 만들기 위한 압박입니다. 파업을 위한 절차를 거쳤기 때문에 불법으로 규정되기도 어렵습니다. 그들 조합원으로 보면 이런 사회적 의제 확장을 위한 노력에도 정규직 노동자가 있는 노조이자 대형사업장이기 때문에 파업이 잘못 됐다고 하면 얼마나 억울할까요. 또한 아무런 내용도 없이 파업한다는 것으로만 기사가 나가면 얼마나 황당할까요. 보도매체 종사자들(특히 기자)에 대해 얼마나 분노감이 들까요. 보도매체 종사자들 대다수(조중동을 제외한 기성보도매체)도 언론노조 조합원으로 있으면서 노동조합과 파업에 대한 이해력은 정말 초등학생 수준이지 않습니까. 이쯤 되면. 더욱이 여기에도 어려운 비정규직들도 있는데, 정규직 대공장 노동자들이 마녀사냥 당하듯이 무조건 '돈 한 푼 더 벌려고 파업한다'라는 이미지만 심어주면 이들 노조는 얼마나 화가 날까요.

  지인들과 술자리 등에서 얘기를 하다보면 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욕설이 장난이 아닙니다. 경향신문 5면 기사를 봐도 노조는 비정규직에게 차라리 사치라고 합니다.
  저는 가끔 주류 미디어(물론 제가 일하는 공장인 경남도민일보도 이 단어의 얹저리에 있진 않는지 고민이 됩니다)의 기사작성 행태를 보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힘겹게, 어려운 삶을 산다고 정규직 노동자들, 아니 모든 노동자, 아니 거의 모든 국민이 그렇게 살아야한다는 것인지 뭔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마디로 노동이나 파업관련 기사에서 한국 미디어들은 골때립니다. 노동3권은 서구에서도 인권 중 가장 큰 부분으로 인정(이른바 사회적 권리로 인정되죠)하는 것인데, 이런 인권의식도 없이 협의의 인권 얘기하는 미디어 종사자들은 인권 공부 처음부터 다시해야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정규직 노동자들이 주류 미디어들이 제시하는 데로 하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와 상황이 나아질까요. 앞서 산별 교섭을 얘기했듯이 더 악화되었으면 될 것입니다. 사용자로서는 더욱 싼 임금으로 아무런 저항없이 노동자를 부려먹을 수 있으니 기꺼이 그렇게 되길 바라겠죠. 그래서 그런 기사의 맨 밑까지 가면 결국 사용자 중심의 이데올로기가 자리를 잡고 있다는 얘기를 하겠죠.


  물론 잘잘못을 따지거나 이데올로기 수준을 얘기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최소한 내용이라도 전달하자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YTN 현대차노조 파업 관련 기사 정말 X입니다.

 끝으로 비정규직이 이처럼 대량 양산된 것에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책임이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향 평준화로 가자는 게 정답이 될 수 있을는지, 책임을 지우는 내용이 달라야하지 않을는지'라는 생각도 함께 드네요.

관련사설 경남도민일보 7월 17일자 사설 '비정규직 해법은 없는가'(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260072)

Posted by 늘 축제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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